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부슈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900년 1월 22일 [[킬(독일)|킬]]에서 출생했으며, [[1906년]]부터 [[1915년]]까지 고향에서 교육을 받았다. 1915년부터 킬의 게르마니아 조선소에서 기계공 일을 시작하였으며, [[1916년]]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(Sozialistische Arbeiterjugend)에 가입했으며, [[1918년]] [[독일 사회민주당]]에 입당했다. 1918년 [[킬 군항의 반란|킬 군항에서의 수병 반란]]에 인상을 받아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(USPD)으로 갈아탔다. [[1920년]] 직장을 잃게 된 그는 배우에 눈길을 돌려 연극 및 음악 분야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으며, [[1921년]]부터 [[1924년]]까지 킬 시립 극장에서 일하였다. 그는 그곳에서 [[오페라]], [[연극]]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. 그는 [[1924년]]부터 [[프랑크푸르트]]와 포메른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. 1927년부터 그는 [[베를린]] 놀렌도르프 광장에 있는 극장인 피스카토어 무대(Piscator-Bühne)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. 이 극장에서 프리드리히 볼프, [[베르톨트 브레히트]], 에른스트 톨러 등의 인물과 함께 활동했으며, 브레히트의 대본과 [[쿠르트 바일]]의 작곡으로 만들어진 [[뮤지컬]] 스타일의 [[오페라]]인 <서푼짜리 오페라(Die Dreigroschenoper)>가 영화로 제작됐을 때 극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인 <[[칼잡이 맥]][* 주로 17~19세기 동안 독어권 지역에서 유행한 강도나 강간, 살인 등 중범죄를 소재로 한 노래. 흔히 장터에서 불려졌고, 수동오르간으로 반주하는 경우가 많았다.](Die Moritat von Mackie Messer)>를 불렀다. [youtube(H0ZF-BZlnGk)] ▲ 영화 <서푼짜리 오페라(Dreigroschenoper, 1931)>에서 <[[칼잡이 맥]]>를 부른 에른스트 부슈 이외에도 여러 영화에 참여했으며, 당시 독일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<쿨레 밤페: 세상은 누구의 것인가?(Kuhle Wampe: Wem gehört die Welt?)>[* 무장 봉기로써 [[경제 대공황]]을 해결하자는 메시지가 담긴 [[충공깽]]스러운 [[좌파]] 성향의 [[영화]]다. 영화의 대본은 [[베르톨트 브레히트]]가 작성했다.]에서 주연을 맡았다. 참고로 그는 이전에 출연한 영화에선 모두 <서푼짜리 오페라>처럼 노래를 부르는 인물로만 등장하였다. 이후 [[나치]]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[[네덜란드]]로 도피했다. 이후 [[벨기에]], [[취리히]], [[파리(프랑스)|파리]],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처럼 다양한 곳을 거치며 도피 생활을 했으며, 결국 [[소련]]으로 이동했다. 그가 소련에 있는 동안에는 영화 작업에 참여했으며, [[1937년]] [[국제여단]][* 각국에서 온 의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다.]의 가수로서 [[스페인 내전|스페인으로 이동했다.]] 스페인에서 그는 국제 여단에서 [[파시즘]]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좌파 선전가를 불렀으며, 국제 여단의 노래책(Canciones de las Brigadas Internacionales)을 만들었다. 1938년 그는 벨기에에서 국제 여단의 선전가를 녹음했으며, 공연했다. [youtube(2CZgXSAAhis)] ▲ 스페인 내전 당시 만들어진 국제 여단의 선전가 .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버전이다. [[http://www.youtube.com/watch?v=jpIKxTJzTuM&list=PL0BD653B91B73B289|스페인 내전에 즈음하여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노래들 듣기]] 그러나 [[2차 세계대전]]이 시작되고, 독일군이 [[베네룩스 3국]]을 침략하자 그는 네덜란드의 [[안트베르펀]]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되었고 남부 프랑스의 Camp de Gurs 수용소로 이송되었다. 그는 1942년까지 그곳에 감금되었으며, [[스위스]]의 국경을 넘어 탈출하려고 했다. 그러나 프랑스 헌병들이 그를 국경에서 체포했고, [[게슈타포]]에게 넘겨진 뒤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를 거쳐 [[베를린]]의 알렉산더 광장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었고, 재판 결과 공산주의 선동 등의 죄목으로 징역을 선고받아 1943년 3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 수감됐다. 재판부는 원래 [[사형]]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, 당시 독일 연극계의 거물이었던 구스타프 그륀트겐스가 막후에서 감형을 위한 로비를 벌여서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.[* 부슈는 전후 그륀트겐스가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자, 반대로 그륀트겐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줘서 풀려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.] 하지만 11월 22일에 [[연합군]] [[공군]]의 야간 [[폭격]]이 있었을 때 자고 있다가 폭격이 교도소 건물을 직격했을 때 침대에서 튕겨나가 책상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. 폭격 후 사상자를 수습할 때 다른 사망자들과 함께 시체더미에 쌓여 있다가 동료 죄수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, 교도소 병원으로 후송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. --수감된 것도 서러운데 폭격까지 당하다니.-- 이후 브란덴부르크 교도소로 옮겨가 계속 옥살이를 하던 도중인 [[1945년]] [[4월 27일]] [[소련군]]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났다.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에는 소련군과 함께 [[베를린 전투]]에도 참가했다. [[1945년]] [[5월]]에는 [[1933년]]부터 자기가 살던 베를린의 예술가 집단 거주지로 돌아갔으며, 독일 공산당(KPD)에 입당했다. [[1946년]] 동베를린 지역의 독일 공산당(KPD)과 [[독일 사회민주당]](SPD)이 [[독일 사회주의통일당]](SED)으로 강제 통합되자, SED에 입당했다. 1949년에는 동베를린으로 영구 이주했다. 이후 [[베르톨트 브레히트]]가 설립한 연극단인 베를린 앙상블에서 전쟁 전처럼 같이 작업했다. 에른스트 부슈는 [[한스 아이슬러]]가 작곡한 노래와 국제 노동운동가 혹은 사회주의 선전가를 부른 가수로서 유명하다. 유튜브에서 에른스트 부슈를 검색하면 그가 부른 곡이 수두룩하게 나올 만큼, 이 양반이 안 부른 독일 노동운동가, 좌파 선전가는 거의 없을 정도다. 그는 [[동독]]에서 선전가 뿐만이 아니라 발라드, 칸타타 등의 다양한 종류의 노래를 불러 음원으로 남겼다.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56년, 1966년, 1979년 동독 국가상(Nationapreis der DDR)을 받았으며, 1970~71년 소련에선 [[국제 레닌 평화상]]을 받았다. [youtube(8S0I0J_fXLo)] ▲ 1930년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<[[비밀스러운 행진]](Der heimliche Aufmarsch)>[* 나치가 전쟁을 준비하니 노동자들이 무장 봉기를 해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가사가 담긴 좌파 선전가다. 한국에 <투쟁의 물결>이라는 개사곡도 있다.]을 부르는 노동자들의 모습. [[한스 아이슬러]]가 작곡했으며, 에리히 바이네르트[* 독일의 작가이며, 그의 이름을 딴 에리히 바이네르트 앙상블이라는 동독군 정예 군악대도 있다.]가 작사한 곡이다. 영상은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문화/예술 방송 arte에서 제작한 한스 아이슬러 다큐멘터리의 일부다. 1961년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배우 활동을 접었는데, 연극 연출이나 노래의 녹음 등의 활동은 계속 했다. 하지만 197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으며, [[1980년]] [[6월 8일]] 타계했다. 사후 그의 유산은 독일 예술대학을 계승한 베를린 예술대학이 소유하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